화폐의 변천사
화폐의 역사는 물물 교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농축민과 목축민의 교환은 대표적인 예이며 필수적인 상황이였습니다.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물물교환의 규모 또한 커졌고 물굴 교환을 통해 수수료를 얻는 상인들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상인들은 소지가 편하고 부패하지 않으며 가치가 인정되는 거래 양측이 모두 인정하는 교환 화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거대 왕국의 특산물 금은 이세가지 조건에 부합되었습니다. 초기에 금은 이집트에서 교환증 즉 화폐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권력자에 의해서 독점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화폐가 되지 못하고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은과 별보배고동 껍데기가 화폐로 사용되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터키의 리디아 지역에서 화폐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리디아 지역에서는 금과 은의 자연합금 일렉트럼으로 주화를 만들고 왕이 주화에 문양으로 세워져 신용의 근거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550년전 페르시아는 리디아를 정복하였고 이지역에 주화와 주화 유통시스템을 도입하여 각국으로 이것이 퍼져 나가게 됩니다. 이를 주화혁명이라 하는데 주화혁명이란 상인대신 그지역 왕이 화폐를 발행하고 그 형태가 균일해지면서 발행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사건을 말합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역시 자신의 얼굴을 추가해서 새기면서 권력 교체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공화정 로마의 경제 기반은 소금 이었으며 소금은 라틴어로 Sal이라고 합니다. Sal이라는 어원으로부터 급여 봉급의 의미를 가지는 Salary 단어가 나왔습니다. 돈을 뜻하는 Money 역시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의 별명인 Moneta에서 파생하였습니다. 헤라 여신은 가정의 살림 즉 국가의 재정을 상징 하였기 때문입니다. 훗날 로마제국은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주아에 은함량을 나추면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고 이를 견딜 수 없게 되어 결국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럼 이때 아시아에서는 어떤 화폐가 나왔을까요. 중국에서는 기원전 3세기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에서 황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반량전이라는 통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중국 화폐는 정부 주도하에 뛰어난 주조 기술을 사용하여 싼값에 동전을 대량생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량 생산된 화폐를 이용하여 권력자들은 백성들에게서 박미다매 식으로 물품을 수탈할수 있었습니다. 돈을 발행할수 있다는 권력은 필요한 것을 자의대로 얻을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중앙 집권식 발행은 결국 화폐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한나라로 넘어오자 한 나라로 넘어오자 기원전 2세기 초부터 기원후 1세기에 이르는 150년간 280억개나 되는 동전이 주조되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북방 유목민 흉노와의 전쟁에 쓰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곡물의 중심이 보리에서 쌀로 이동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쌀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작물입니다. 경제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자 중국에서 재료부족으로 인해 동전이 크게 부족해지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자 관료들은 어음을 종이로 만들어 발행하게되고 지폐가 화폐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원나라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 전체가 지폐를 사용한 지폐 제국이 됩니다. 14세기에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는 원 황제 쿠빌라이칸 밑에서 17년간 관료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이과정에서 지폐의 편리함에 큰 감명을 받았고 지폐의 사용이 유럽으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 960년경 액면에 기입된 만큼의 돈을 약속 기일에 지급할 것을 약속하는 어음을 만들어서 상인들의 송금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어음혁명이라고 합니다. 이슬람 제국에서 민간상인이 어음과 수표로 신용 경제를 확장하고 부족한 통화를 보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음 기술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퍼져 나갑니다.
13세기 금융업자는 외환 어음으로 무역을 결제하기도 했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산업혁명으로 경제중심이 북해주변의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때 유대상인이 어음기술을 크게 발전시킵니다. 17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에 걸친 전쟁에서 재정난에 빠진 영국이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합니다. 그동안의 채무는 왕 개인의 채무였으나 그러나 그것이 국가의 채무로 바뀌고 의회가 세금으로 상환을 해주겠다고 확실히 약속을 함으로 국채는 안정적인 투자의 대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에 따라 상인들은 잉글랜드 은행을 조직해 이익을 함께 도모합니다.
잉글랜드 은행은 국가의 허가 아래의 자본금 내에서 이자가 붙는 무기명 날인 어음을 발행하게 됩니다. 즉 종이돈을 만들어도 좋다고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은 것입니다. 잉글랜드 은행의 무기명 어음은 실질적인 영국 지폐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음혁명 과정을 거치면서 통화의 관리권이 왕과 귀족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것입니다. 영국에 패전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 6년후 재정파탄을 맞이하게 되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혁명이후 정부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국유화된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담보로 아시냐라는 채권을 발행하게 됩니다. 일종의 약속어음이 발행량이 늘면서 지폐가 됩니다. 그리고 과도한 아시냐의 발행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맞이하게 되고 액면가의 3/1000의 가치로 떨어지게 된겁니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아시냐 회수를 정지하고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징병제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시대 최고의 금융재벌가 로스차일드 가문이 탄생하게 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은 유럽이 금융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정치적인 안목과 정확한 정보가 곧 돈벌이 수단이 되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의 지속적인 전쟁과 경제 악화로 지폐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영국은 화폐 법을 가장 신용도가 높은 소브린 금화를 주조합니다. 잉글랜드 은행이 발행하는 지폐는 언제라도 소브린 금화와 교환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금과 동등해진 파운드 지폐는 신용이 높아져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됩니다.
1892년 런던 금융공황때 파운드를 금과 교환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이때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을 조달하면서 우기 극복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잉글랜드 내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지는 사건입니다. 1833년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 파운드가 법화로 정해기게 됩니다.
잉글랜드 은행은 중앙은행이 되었고 이후 잉글랜드 은행은 각국 중앙은행의 모델이 됩니다. 금본위제는 1870년대 이후 영국을 모방한 각국이 금과 자국지폐의 교환을 무제한으로 보증하는 체제를 도입함으로서 세계화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세기 후반 금본위제를 토대로한 파운드가 세계기축 통화가 되었습니다. 다음시간에 기축통화 달러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서서히 달러의 몰락이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 우리는 다음 기축통화가 무엇이 될지 곰곰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봐야 할것입니다. 분명 Digital currency에서 다음 세계 기축통화가 나올겁니다. 혹시 비트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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